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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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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은 1810년 토리노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정치가로,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를 역임하며 이탈리아 통일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크림 전쟁 참전을 통해 외교적 입지를 다졌다. 플롱비에르 밀약을 통해 프랑스의 지원을 확보하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이끌었으며, 중부 이탈리아 합병을 성사시켰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된 후 초대 총리가 되었으나, 그 해 6월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카부르는 '자유로운 국가 안의 자유로운 교회'를 주장하며 로마 문제 해결을 시도했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 이탈리아의 문화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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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카밀로 벤소 카부르의 초상 (안토니오 치제리 그림, 1861년)
카밀로 벤소 카부르의 초상 (안토니오 치제리 그림, 1861년)
이름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
출생일1810년 8월 10일
출생지토리노, 프랑스 제1제국
사망일1861년 6월 6일
사망지토리노, 이탈리아 왕국
국적이탈리아
정당역사적 우파
서명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Signature.svg
작위 및 훈장
훈장SOMHA
OSML
COS
정치 경력
직책제1대 이탈리아 왕국 총리
재임 기간1861년 3월 23일 ~ 1861년 6월 6일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전 총리본인 (사르데냐 왕국 총리로서)
다음 총리베티노 리카솔리
사르데냐 왕국 총리
직책사르데냐 왕국 총리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재임 기간1860년 1월 21일 ~ 1861년 3월 23일
이전 총리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다음 총리본인 (이탈리아 왕국 총리로서)
사르데냐 왕국 총리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재임 기간1852년 11월 4일 ~ 1859년 7월 19일
이전 총리마시모 다젤리오
다음 총리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재무부 장관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총리마시모 다젤리오
재임 기간1851년 4월 19일 ~ 1852년 5월 11일
이전 장관조반니 니그라
다음 장관루이지 치브라리오
농업 및 무역부 장관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총리마시모 다젤리오
재임 기간1850년 10월 11일 ~ 1852년 5월 11일
이전 장관피에트로 데 로시 디 산타로사
다음 장관주세페 나톨리 (1861년)
의회 의원
의원하원 의원
재임 기간1848년 6월 30일 ~ 1861년 3월 17일
선거구토리노

2. 생애

1810년 8월 10일, 당시 프랑스 제국의 지배를 받던 피에몬테 지방 토리노에서 아버지 미켈레 벤소(초대 카브르 후작)와 어머니 아델레 데 세론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1세의 퇴위 후 토리노는 사르데냐 왕국의 통치하에 돌아왔다. 카부르는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자유주의 사상을 키워 군대 내에서 위험 인물로 감시받자 1831년 제대했다.

군 제대 후 카부르는 실업가로 전향하여 농업과 저널리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알베르토 헌장을 발표하고 의회를 설치하자, 카부르는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84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사르데냐 왕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하고, 마시모 다젤리오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1850년 카부르는 다젤리오 내각의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 1852년 다젤리오가 사퇴하자 카부르가 수상직을 이어받았다. 카부르 정권 초기, 칼라비아나 위기를 극복하고 정교분리·세속화를 추진했다.

1854년 크림 전쟁 발발하자 영국프랑스사르데냐 왕국에 참전을 요청했고, 카부르는 이를 외교적 기회로 여겨 참전했다.

카부르는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 왕국의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카부르는 1858년 나폴레옹 3세와 플롬비에르의 비밀 조약을 체결,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으나, 나폴레옹 3세는 빌라프랑카 조약을 통해 단독으로 강화했다. 카부르는 이에 항의하여 사퇴했으나, 1860년 정치적 혼란 속에 수상으로 복귀, “의회 독재”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당초 카부르는 이탈리아 전역 통일을 구상하지 않았으나, 주세페 가리발디의 천인대 원정으로 양시칠리아 왕국 정복이 시작되자, 이탈리아 전역 통일로 방침을 전환했다.

1861년 3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고, 카부르는 초대 수상이 되었으나, 76일 만에 사망했다. 말년에 카부르는 남부 문제와 브리간테 진압에 힘썼다.

1861년 5월 말, 카부르는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증상을 보였고, 6월 6일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카부르 백작(Count of Cavour)의 문장(Coat of arms): "은색 바탕에 붉은색 상단부에 세 개의 노란색 가리비 조개껍데기."


카밀로 벤소는 1810년 8월 10일 프랑스 제국피에몬테토리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켈레 벤소(초대 카브르 후작)였고, 어머니는 아델레 데 세롱이었다. 그의 대부(代父)는 카밀로 필리포 보르게세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카밀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24] 당시 피에몬테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일상 대화에서 사용했고, 프랑스어가 공용어에 가까웠기 때문에, 카부르는 평생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25]

카밀로와 그의 형 구스타보는 처음에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는 열 살 때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24년 7월, 그는 샤를 알베르의 시종(page)이 되었다. 카부르는 고집이 세고 엄격한 군대 규율을 따르지 못해 종종 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사관학교에서 금서를 소지한 혐의로 빵과 물만 먹고 사흘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수학에 재능이 있어 1827년 왕립 사르디니아 군대의 공병대(Engineer Corps)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그는 영어와 제러미 벤담, 벤자민 콘스탄트의 저서를 공부하며 자유주의적(liberal) 경향을 키웠고, 이 때문에 당시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5] 그는 군 생활에 대한 지루함과 샤를 알베르 왕의 반동적인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1831년 11월 사임했다.[4] 그는 수도에서 약 40km 떨어진 그린자네(Grinzane)의 가족 영지를 관리하며 1832년부터 1848년 혁명까지 그곳의 시장으로 일했다.

그 후 카부르는 친척들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런 다음 그는 파리로 여행을 갔는데, 특히 프랑수아 기조아돌프 티에르의 의회 토론에 감명을 받고 정치 경력에 대한 열정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그는 런던으로 갔는데, 영국 정치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했고, 영국을 여행하며 옥스포드, 리버풀, 버밍햄, 체스터, 노팅엄, 맨체스터를 방문했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독일어권 지역과 제네바 호수 지역)를 짧게 여행한 후 결국 토리노로 돌아왔다.

카부르는 경제적 진보가 정치적 변화에 앞서야 한다고 믿었고, 이탈리아반도에서 철도 건설의 이점을 강조했다.[4] 그는 증기 기관을 이용한 운송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많은 철도와 운하 건설을 후원했다. 1838년부터 1842년까지 카부르는 지역의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사탕무 재배와 같은 다양한 농업 기술을 그의 영지에서 실험했고, 화학 비료를 사용한 최초의 이탈리아 지주 중 한 명이었다.[6] 그는 또한 피에몬테 농업 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여가 시간에 다시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퇴위하면서 유럽에는 빈 체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출현했다. 이탈리아는 작은 국가들이 분열된 상태였다. 이탈리아 북부에는 사르데냐 왕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중부에는 로마 교황령,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남부에는 양시칠리아 왕국이 존재했다.[26]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이탈리아라는 말은 지리적 명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27]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국왕을 겸임했으므로 오스트리아 영토와 마찬가지였다.[28]

카브르의 고향인 토리노사르데냐 왕국의 영토로 돌아왔다. 사르데냐 왕국은 사르데냐, 피에몬테, 리구리아, 사부아, 니스를 영토로 했다.[29] 국호에 사르데냐를 冠(관)하지만 정치·경제의 중심은 피에몬테였고, 왕궁도 피에몬테에 있었다. 카브르의 아버지 미켈레는 국유화된 수도원의 폐지로 레리의 약 900헥타르의 농지를 얻었다.[30] 나폴레옹 퇴위 후에는 사보이아 왕가에 접근하여 자신의 가문의 몰락을 막았다.[31]

카브르의 생가인 카브르 궁전

2. 2. 군 복무와 자유주의 사상의 형성

카보우르의 초기 초상화


교황 비오 9세의 초기 자유주의적 조치와 1848년 혁명은 새로운 이탈리아 자유주의 운동을 촉발했고, 카보우르는 더 이상 경찰의 감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치 무대에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피에몬테의 헌법 제정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결국 승인되었다.[3]

피에몬테 귀족의 차남이나 삼남은 군인이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카부르는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821년 10세의 나이로 토리노 왕립 사관학교(Accademia Reale di Torino)에 입학했다.[32] 1826년 사관학교 최종 시험을 치렀는데,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축성법, 전술 전략학, 일반 건축학, 역사학 등의 과목은 만점이었다고 한다.[33]

카부르는 사관학교 시절 섭정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 di Savoia)의 시종(近習)을 맡는 영광을 누렸다.[34] 그러나 시종 임무 수행에 불만이 있었고, 사관학교 졸업 때 "이제야 드디어 시종의 제복을 벗어던질 수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카부르의 실언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도 전해져 그의 노여움을 샀다.[35]

사관학교 졸업 후 공병의 길을 선택하여 1826년 9월 공병대 중위로 임관되었다.[37] 요새 건축 및 보수 임무를 수행했다.[38] 임무 중 틈틈이 정치, 경제, 역사 관련 서적을 읽었다.[39] 영국에서 발전한 경제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40]

1830년 제노바로 전속되었다. 제노바는 사르데냐 왕국에서 경제 활동과 문화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41]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이 시기에 주세페 마치니나 카르보나리 당원과 교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42] 프랑스 혁명에서 테러 정치 체제가 등장한 것을 보고 공화주의에는 부정적이었으며, 사회를 근본부터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43] 제노바 배속 시절 카부르는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다 (→여성 관계 참조). 어린 시절 외가 친척이 사는 제네바에 자주 머물렀는데, 제네바는 종교적·사상적으로 관용적인 도시였고, 학자들은 그것이 카부르의 자유주의 사상 발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44]

당시 이탈리아에는 혁신 세력으로 자유주의자 그룹과 공화주의자(민주주의자) 그룹이 존재했다. 민중의 권리 신장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공화주의자 그룹이 더욱 급진적이어서 인민 주권과 군주제 폐지 등을 주장했고, 자유주의자 그룹은 재산 등을 기준으로 한 제한 선거로 완전한 인민 주권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45] 공화주의자 그룹의 맹주는 주세페 마치니였으며, 마치니주의자라고도 불렸다.[46]

자유주의 사상을 키운 카부르는 위험 사상의 소유자로 군대 내에서 감시를 받게 되었다.[47] 조직 행동이나 규율 준수와 같은 군인 기질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48], 더 이상 군대에 남는 것을 싫어하여 군을 제대하기로 결심했다. "저는 감시당하고 있으며, 동료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 남을 수 없습니다. 저는 농업에 종사할 수도 있고, 관리 능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한 생활이나 사색만 하는 생활을 보내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현재의 문제점과 미래의 전망을 아버지에게 서한으로 설명했다.[49][50] 1831년 11월 사르데냐 군을 제대했다.[51] 당시 카부르는 21세였다. 카부르를 싫어했던 카를로 알베르토(1831년 국왕에 즉위)는 카부르에 대한 괴롭힘으로, 앞으로 예비역 군인으로서 의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더라도 공병대 군복을 착용하여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52] 제대 당시 카부르의 최종 계급은 중위였다.[53]

2. 3. 유럽 여행과 정치 입문

1848년 혁명교황 비오 9세의 초기 자유주의적 조치들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자유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다. 카보우르는 경찰의 감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치 무대에 등장하여, 피에몬테의 헌법 제정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결국 헌법 승인으로 이어졌다.[3] 그러나 카보우르는 다른 정치 사상가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하원 의원직을 제안받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다소 의심스러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3]

카보우르는 통일된 국가 건설을 계획한 적이 없었고, 총리 재임 기간에도 그의 목표는 통일 이탈리아가 아닌 롬바르디아-베네치아 합병을 통한 피에몬테의 확장이었다.[7] 보수주의 시대에 그는 비혁명적 진보주의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대중 연설에는 서툴렀다.[7] 카보우르는 다음 선거에서 패배했고, 노바라 전투에서 피에몬테군이 패배하면서 샤를 알베르는 퇴위하고 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7]

이후 카보우르는 유권자들에 의해 의회로 복귀하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 시장과 현대 경제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1850년에 농업부 장관, 상업부 장관, 해군부 장관직을 역임했다.[8] 카보우르는 마시모 다젤리오 총리 내각을 장악했고, 하원에서 우익 중도와 좌익 중도를 통합하여 영향력을 과시했다. 1851년, 카보우르는 내각 내 동료에 대한 다소 불명예스러운 인수 과정을 통해 재무부 장관으로 승진했고, 이는 그의 많은 경제 개혁으로 인해 피에몬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8] 카보우르는 철도 확장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1860년까지 피에몬테에 800km의 철도를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 철도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그는 교회의 토지 소유권, 학교 통제, 결혼법 감독 권한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주도했고, 주교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처벌받거나 추방되었다. 이를 통해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전역의 자유주의 반교권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8]

카보우르는 1834년 12월, 5살 위의 친구 피에트로 디 산타로사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64][65] 파리에서 약 2개월간 머물며 파리를 시찰하고,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지식인 및 정치인들과 교류했다.[66] 1835년 5월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도시 곳곳을 시찰하고 하원을 방청했다. 카보우르는 영국의 의회 정치를 높이 평가했지만, 졸거나 사담을 나누는 의원들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다.[67][68]

1848년, 유럽 각국에서 혁명 운동(1848년 혁명|1848년 혁명한국어)이 발생했다. 카부르는 『리스르지멘토』지에서 "국왕 폐하는 입헌제를 확립하기 위해 헌법을 발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9]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왕정 전복을 우려하여 1848년 3월 4일에 헌정헌법을 발포했다.[90] 카를로 알베르토는 "헌법"이 아닌 "헌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파가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헌법"이라는 용어에 반군주제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91] 알베르토 헌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의회가 설치되고 대의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상원의원은 국왕이 임명권을 가지지만, 하원의원은 공선 제도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납세액에 따라 선거권이 주어지는 제한 선거였으며 보통선거는 아니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은 사르데냐 왕국의 총 인구 480만 명 중 약 1.7%에 해당하는 8만 명에 불과했다.[92]

2. 4. 사르데냐 왕국 총리 시절

카부르는 1852년 11월, 마시모 다젤리오의 뒤를 이어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자리에 올랐다.[177] 총리가 되기 전, 우르바노 라타치와 ''콘누비오''("결혼")라는 연정을 구성하여 우익과 좌익의 온건파를 통합했고, 이로 인해 다젤리오 내각이 몰락하게 되었다.[9]

카부르는 자유무역, 사상의 자유, 세속 통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였으나,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공화주의자와 혁명가들을 경계했다. 의회 운영에 능숙했던 카부르는 비상권 과도 사용, 측근 채용, 일부 언론 매수 및 탄압, 선거 조작 등 논란이 많은 방법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특히 철도 건설과 사르데냐 왕국 해군 증강 등 현대화 사업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국가 부채가 6배나 증가했다.[9]

1854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프랑스사르데냐 왕국에 참전을 요청했다. 카부르는 이를 영국과 프랑스에 은혜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여겨 참전을 결정했다.[254] 파리 강화 회의에서 사르데냐 왕국의 주장을 유럽의 전권 대표들에게 호소할 기회를 마련한 카부르의 공적을 기려 국왕은 카부르에게 Ordine supremo della Santissima Annunziata|아눈치아타 대훈장it를 수여했다.[253]

1858년 1월, 이탈리아인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시도는 역설적으로 프랑스와 피에몬테 사이의 외교적 길을 열었다. 카부르와 나폴레옹 3세는 1858년 7월 플롱비에르 레 방에서 만나 협정을 통해 피에몬테가 모데나 공국과의 전쟁을 유발하여 오스트리아가 참전하도록 유도하고, 프랑스는 피에몬테를 지원할 것이라고 합의했다. 대신 카부르는 사보이아와 니스 백작령을 프랑스에 할양하기로 합의했다.[11]

1859년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했다(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그러나 나폴레옹 3세솔페리노 전투의 참상, 프로이센의 전쟁 참전 가능성, 과도하게 강력한 피에몬테 국가의 잠재력 등의 이유로 1859년 7월 11일 오스트리아와 별도의 평화 조약에 서명하여 전쟁을 끝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은 평화를 받아들였지만, 카부르는 조약 조항을 읽은 후 격분하여 사임을 제출했다.[385]

1860년 1월 20일, 카부르는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그는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피에몬테에 합병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보이아와 니스를 할양하기로 나폴레옹 3세와 합의하고, 이 변화를 승인받기 위해 해당 주들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냈다.[14]

2. 4. 1. 내각 구성과 개혁 정책

카부르는 우르바노 라타치와 연합하여 ''콘누비오''(결혼)로 알려진 연정을 구성, 우익과 좌익의 온건파를 통합하여 1852년 11월 다젤리오 내각의 몰락을 가져왔다.[9]

카부르는 자유무역, 사상의 자유, 세속 통치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였으나,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공화주의자와 혁명가들을 경계하였다. 의회 운영에 능숙했던 카부르는 비상권 과도 사용, 측근 채용, 일부 언론 매수 및 탄압, 선거 조작 등 논란이 될 만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당시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9] 특히 철도 건설과 사르데냐 왕국 해군 증강 등 현대화 사업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국가 부채가 6배나 증가했다.[9]

2. 4. 2. 크림 전쟁 참전과 외교적 성과

크림 전쟁 종결을 위한 강화 회의가 1856년 2월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카부르는 이 회의에서 사르데냐 왕국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처음에는 전 총리인 다 체를리오를 참석시키려 했다.[248] 그러나 다 체를리오는 카부르에게 직접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절했고, 결국 카부르가 직접 강화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249][250]

회의에는 오스트리아의 전권 대표도 참석했는데, 카부르는 오스트리아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지배와 교황령에 대한 지원이 이탈리아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지배가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라고 반박했다.[251] 카부르는 회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전권 대표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크림 전쟁 참전 자체로 사르데냐 왕국이 얻은 것은 없었지만, 카부르는 "장래에 결실을 맺을 씨앗을 뿌렸다"라고 말했다.[252] 파리 강화회의에서 사르데냐 왕국의 주장을 유럽의 전권 대표들에게 호소할 기회를 마련한 카부르의 공적을 기려 국왕은 카부르에게 Ordine supremo della Santissima Annunziata|아눈치아타 대훈장it를 수여했다.[253]

카부르는 크림 전쟁 이후,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에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명분을 만들었다. 역사학자 로사리오 로메오는 "카부르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자유주의 진영 정책과 이탈리아 민족 운동의 목표를 일치시킬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중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족주의자들은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했다.[254]

카부르는 자력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롬바르디아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접근했다. 처음에는 영국 정부에 접근했지만, 영국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우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55]

나폴레옹 3세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이에 카부르는 프랑스에 접근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당시 유럽의 세력 구도를 바꾸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저해하는 빈 체제를 파괴하고, 이탈리아 여러 국가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고 했다.[256][257] 카부르는 이러한 나폴레옹 3세의 야망을 간파하고, 외교관 코스탄티노 니그라를 통해 나폴레옹 3세와의 비밀 조정을 진행했다.[258]

또한 카부르는 나폴레옹 3세를 포섭하기 위해, 그의 사촌이자 미녀로 명성이 높았던 비르지니아 올도이니를 활용했다. 카부르는 그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만 하면 된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259] 비르지니아는 1856년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 3세에게 접근했다. 이른바 '허니트랩'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60]

카부르는 중부 이탈리아 획득을 위한 전쟁의 명분을 준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의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역사는 큰 즉흥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61][262]

2. 4. 3. 플롱비에르 밀약과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카부르는 크림 전쟁 이후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254] 크림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면 비판이 집중될 것을 우려하여, 영국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로사리오 로메오는 카브르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자유주의 정책과 이탈리아 민족 운동의 목표를 일치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254]

카부르는 자력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롬바르디아를 탈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접근했다. 영국 자유당 정권에 먼저 접근했으나, 크림 전쟁 이후의 염전(厭戰) 여론으로 인해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255]

이후 카브르는 프랑스에 접근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빈 체제를 파괴하고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256][257] 카브르는 외교관 코스탄티노 니그라를 통해 나폴레옹 3세와 비밀리에 접촉했다.[258] 또한, 미녀로 이름 높았던 카브르의 사촌 비르지니아 올도이니를 나폴레옹 3세의 정부(情婦)로 보내 소위 허니트랩을 실행했다.[259]

1858년 1월 14일,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Orsini affair|오르시니 사건영어)이 발생했다.[279][280]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정부는 사르데냐 왕국에 혁명가 추방과 신문 발매 금지를 요구했다.[283] 카브르는 이를 수용했지만, 언론·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새로운 법률 제정은 거부했다.[286]

테러를 일으킨 올시니는 옥중에서 나폴레옹 3세에게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협력해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고,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공개했다. 프랑스에서는 올시니에게 동정 여론이 모였지만, 그는 처형되었다.[287][288]

카브르와 나폴레옹 3세의 이탈리아를 둘러싼 권모술수를 그린 풍자화.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소설 『약혼자』의 등장인물에 비유하고 있다. 중앙의 뚱뚱한 인물이 카브르, 왼쪽 끝이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 약 반년 후, 나폴레옹 3세의 비밀 사절이 토리노를 방문하여 플롱비에르 레 방(Plombières-les-Bains|플롱비에르 레 방프랑스어)에서 비밀 회담을 제안했다.[291] 1858년 7월 21일, 카브르는 플롱비에르에서 나폴레옹 3세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299]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 왕국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탈환에 군사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대신 북이탈리아 왕국(사르데냐 왕국), 중부 이탈리아 왕국(통치자 미정), 교황령, 양시칠리아 왕국의 4개국으로 이탈리아를 분할 통치할 것을 제안했다.

비밀 협약 이행에는 세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 오스트리아 측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키게 하여 프랑스에 참전 명분을 주는 것과 전비는 모두 사르데냐 왕국이 부담하는 것. 둘째,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것. 셋째, 나폴레옹 공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딸 클로틸데와의 정략 결혼이었다.[300]

카브르는 조국을 위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302] 카브르는 플롱비에르 밀약을 "당대 최고의 기획"이라고 불렀다.[304]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브르 내각의 노력으로 철도망, 도로망, 통신망이 정비되어 전쟁에 이용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피에몬테의 철도망은 총 연장 약 850km에 달했다.[305]

1859년 1월 신년사에서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관계는 생각만큼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했다.[306] 국왕도 신년사에서 "이탈리아 전토에서 들려오는 Grido di dolore|고통의 외침it에 무관심으로 있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308]

카브르는 모데나에서 반(反)오스트리아 봉기를 일으켜 전쟁의 발화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실패했다.[310] 카브르는 주세페 가리발디에게 의용병 지휘권 일부를 맡겨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312]

그러나 영국 정부는 프랑스-사르데냐 왕국 간의 비밀 협정을 간파하고 전쟁에 반대하며, 사르데냐 왕국의 전시 태세 해제를 요구했다.[315] 러시아는 전쟁 회피를 위한 국제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318]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문제 개입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프랑스 외무장관 알렉상드르 발레브스키는 카브르에게 전시 태세 해제를 요구했다.[321]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위기에 처하자 카브르는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323] 그러나 친구 Michelangelo Castelli|미켈란젤로 카스텔리it의 설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326]

1859년 4월 23일, 카브르는 국가 총력전 체제를 갖추기 위해 정부에 전권을 위임하는 법안(전권 위임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법안은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고, 카브르는 사실상 사르데냐 왕국의 독재자가 되었다.[336]

4월 27일,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4월 28일, 오스트리아는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337]

밀라노에 입성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나폴레옹 3세


1859년 5월 3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황은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1859년 6월 4일 마젠타 전투에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6월 9일에 국왕과 나폴레옹 3세는 밀라노에 입성했다.[351]

코스탄티노 니그라


1859년 6월 24일, 솔페리노 전투가 발발했다.[352] 전투는 연합군이 간신히 승리했지만, 양군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354]

전투 후 프랑스군에서는 티푸스가 유행했고,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국경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도 나폴레옹 3세에게 전달되었다.[355][356] 나폴레옹 3세는 1859년 7월 6일, 동맹국인 사르데냐 왕국에 사전 협의 없이 오스트리아 측에 휴전을 제안했다.[357]

1859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빌라프랑카에서 회담했다.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화 조건이 논의되었다.[366][367][368]

  •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에서 사르데냐 왕국에 롬바르디아를 양도한다.
  •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남는다.
  •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연방을 창설하고, 교황을 그 수장으로 한다.
  • 카브르의 사퇴를 요구한다.(명문화되지는 않음)


이 내용은 플롱비에르 밀약에 반하는 것이었다.

국왕과 대립하는 카부르 ( 그림)


국왕은 카부르와 몬차바노에서 7월 12일 자정 1시에 면회했다.[373] 협정서 내용을 본 카브르는 격분하여 국왕에게 '''"당신이 국왕? 이 나라의 진정한 왕은 바로 나다!"'''라고 소리쳤다.[377][378] 국왕도 격분하여 "네가 국왕이라고? 너는 무례한 자일 뿐이다."라고 응수했다.[379]

카브르는 수상을 사임했고, 국왕은 군인인 라 마르모라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했다.[385]

1859년 11월 11일, 취리히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쟁의 종결이 확인되었다.[389]

2. 4. 4. 중부 이탈리아 합병

1857년 8월, 다니엘레 마닌과 주세페 라 파리나 등에 의해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하는 정치 결사인 이탈리아 국민 협회가 결성되었다.[263] 이탈리아 국민 협회는 마치니주의자(공화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이탈리아 통일이 달성된다면 군주제라도 좋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할 지도자로 사르데냐 왕국과 그 군사력에 기대를 걸었다.[264]

1857년 9월 12일, 카보우르는 주세페 라 파리나와 자신의 저택에서 회담을 가졌다. 카보우르는 마치니주의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국민 협회를 배후에서 지원했다.[265] 이탈리아 국민 협회의 활동은 사르데냐 왕국의 중부 이탈리아 합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266]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무렵부터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Società nazionale italianait의 활동으로 인해, 이들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가 쫓겨나고 사르데냐 왕국 친화적인 정권이 수립되었다.[406] 중부 이탈리아 여러 정부는 사르데냐 왕국과의 합병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407]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를 원치 않았고,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의 군주를 복위시키고, 자국이 지배하는 베네치아도 포함시켜,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연방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8][409] 이는 취리히 조약에서도 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410] 라 마르모라 내각은 중부 이탈리아 합병에 주저했다.[411]

피렌체를 방문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프로이센은 이탈리아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 회의 개최를 촉구했다.[412]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카보우르를 사르데냐 대표로 회의에 파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당시 내무장관 라타치는 "카보우르가 전권을 갖게 되면 그가 복권하고, 라 마르모라 내각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국왕도 "독재자 카보우르를 다시 등장시키느니 차라리 퇴위하겠다"고 말했다.[413]

영국의 수상으로 재등판한 제3대 팔머스턴 백작(자유당)은 당시 이탈리아 지역의 정국 혼란을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 여기고, 세력 균형의 관점에서 이탈리아에 외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바랐다.[414] 그러기 위해서는 카보우르의 재등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사르데냐 주재 대사 제임스 허드슨에게 카보우르를 재등판시키도록 국왕에게 타진하게 했다.[415]

국왕은 정국 혼란의 수습과 카보우르의 재등판을 바라는 여론에 부응하기 위해, 1860년 1월 마지못해 카보우르를 다시 수상으로 임명했다. 카보우르는 국왕을 알현하여 자신 외에는 이 난국에 대처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말했지만, 국왕은 한 번도 카보우르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416] 카보우르는 이전의 제2차 카보우르 내각과 마찬가지로 수상 외에 외무대신, 내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을 겸직하여 독재적인 권한을 손에 넣었다.[417] 의회 하원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확립한 카보우르 정권 후기는 카보우르 일강의 양상이 되었고, 그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카보우르 본인의 자발적인 사퇴(혹은 본인의 사망)가 아니면 카보우르 내각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의원 세력이나 정부 지지 세력의 의원으로부터도 카보우르 정권(후기)은 “의회제 독재”라고 불렸다.[418](단, 사보이아와 니스를 할양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권위가 저하되었다).

카보우르는 취리히 조약에서 정해진 이탈리아 연방의 창설을 무효화하기 위해, 1860년 3월 11일에 사르데냐 왕국에의 합병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를 중부 이탈리아에서 실시하게 했다. 결과는 합병 찬성이 압도적 다수였고, 사르데냐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했다.[420]

나폴레옹 3세는 북이탈리아에 강대한 통일 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경계하고, 사르데냐 왕국이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한다고 해도, 합병은 토스카나를 제외한 파르마와 모데나에 한정해야 한다고 사르데냐 왕국에 타진했다.[421] 카보우르는 중부 이탈리아의 합병 승인과 교환으로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제안을 하고, 프랑스의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다.[423]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합병 승인과 교환으로 1860년 3월 24일의 Trattato di Torino (1860)it에서 사보이와 니스는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2. 5. 이탈리아 왕국 성립과 사망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하고 카브르를 이탈리아 총리로 임명했다. 카브르는 국가 군대 창설, 어떤 지역에 어떤 법적 제도를 유지할 것인지, 특히 로마의 미래 등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고려해야 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로마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교황의 속지권과 가톨릭 교회의 독립과 상충되었다. 카브르는 로마가 독립성을 유지하지만 속지권을 포기하는 "자유로운 국가 내 자유로운 교회"의 본거지로 남아야 한다고 믿었다.[18] 이러한 문제들은 "로마 문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베네토도 문제였다. 카브르는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베네치아의 해방이 무력으로 이루어질까요, 아니면 외교로 이루어질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것은 신의 섭리의 비밀입니다."라고 말했다.[19] 그의 외교 정책을 승인하는 결의안은 압도적인 다수결로 통과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좌익과 우익 극단주의 집단만이 반대했다.

1887년 우루과이에서 발행된 10페소 지폐. 카브르와 가리발디의 이미지가 담겨있음


이탈리아 건국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은 총리에게 더 큰 부담이 되었다. 1861년, 그의 경력의 정점에서, 긴 날들과 불면증, 그리고 끊임없는 걱정은 카브르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아마도 말라리아로 병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사혈을 고집했다. 담당 의사는 거절했지만, 그는 당시 부재중이었고, 그래서 카브르는 그에게서 피를 뽑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사혈을 당했다. 그는 토리노 근처 산테나에 묻혔다.

그의 죽음 후, 이탈리아는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과정에서 1866년 베네치아를 얻었고,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관련이 있다. 로마 점령은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를 제외하고)을 완료했다.

카브르는 1861년 5월 말에 병에 걸렸다.[668] 5월 29일 하원에서 세출 초과 문제(재정 적자 문제) 등을 논의했고,[669] 그 후 애인 비안카 론자니의 집에 들렀다가 귀가하는 도중에 몸 상태의 이상을 느꼈다.[670] 카브르는 심한 구토 증세에 시달렸다.[671]

카브르는 의사를 불렀고, 그때는 오랫동안 카브르의 주치의였던 암브로지오 타렐라 의사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로시 의사가 치료를 담당했다.[672] 로시 의사는 평소처럼 사혈 치료를 실시했다(사혈은 3회 실시되었다).[673] 카브르는 오랫동안 말라리아로 보이는 증상으로 자주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사혈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호전되었다.[674] 카브르와 주치의는 이 증상을 뇌울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675]

이때도 사혈로 일단 증상이 호전되고 병이 나은 것처럼 보였고, 카브르는 니그라 등과 일하고 있었다.[676] 그러나 5월 31일 낮에 증상이 재발하여 카브르는 고열에 시달렸고 헛소리 증상도 나타났다. 로시 의사는 해열을 위해 소량의 키니네를 카브르에게 투여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카브르는 로시 의사에게 추가 사혈을 하도록 요구했고, 로시 의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을 실시했다.[677] 사혈을 했기 때문인지 6월 2일 아침에 카브르의 열이 내렸다. 하지만 카브르의 체온은 급격히 떨어졌고, 카브르의 조카녀인 주세피나에 따르면, 카브르의 손은 대리석처럼 차가웠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카브르에게 고열 증상이 나타나고 헛소리도 나타났다. 카브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지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까지의 기억을 환각으로 마치 주마등처럼 보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되었다.[678] 카브르는 목마름도 호소했고, 로시 의사는 부순 얼음을 카브르에게 주었다.[679]

로시 의사는 자신과는 다른 안젤로 마포니 의사의 판단을 구했고, 6월 3일에 마포니 의사가 진찰을 위해 방문했다.[680] 카브르는 다른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것을 거부했지만, 카브르의 친척들이 마포니 의사의 진찰을 받도록 간청했고, 카브르가 굽혔다. 카브르는 마포니 의사에게 빨리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며 “이탈리아는 내 손안에 있다. 시간이 귀하다. 내일 발도네키아에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포니 의사는 로시 의사의 “카브르는 뇌울혈을 일으켰다”라는 진단 결과에 동의했지만,[681] 고열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아 악성 말라리아도 의심했고, 로시 의사와 마포니 의사는 해열제로 키니네를 하루 3회 복용하도록 카브르에게 요구했다. 카브르는 그것을 삼키려고 했지만,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토했다.[682][683] 의사들은 키니네 투여를 포기했다. 카브르는 마포니 의사에게도 추가 사혈을 하도록 요구했고, 마포니 의사는 그것에 응하여 팔에서 사혈을 실시했지만, 카브르의 맥박은 약해져 있었고 피를 배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684] 카브르의 친구이자 의사이기도 한 파리니도 카브르를 진찰했지만,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685]

카브르는 자신의 죽음을 깨달았다. 로마 교황과 가톨릭 교회와 대립했던 카브르였지만, 무신론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 것을 바랐다. 카브르는 파문되었지만 지인인 자코모 신부(마돈나 델리 안젤리 교회의 교구 사제)에게 부탁하여, 6월 5일 아침에 카브르는 성사(고해성사)를 받았다.[686] 파문된 자에게 성사를 베풀었기 때문에 교황 피우스 9세는 자코모 신부의 성직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했다. 2011년에 발견된 자코모 신부가 피우스 9세에게 보낸 서한에는 “카브르 백작은 정신 착란이 보였지만, 백작은 확실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라고 적혀 있었다.[687] 자코모 신부에 대한 처벌은 다음 교황 레오 13세 때에 이르러서야 해제되었다.[688] 카브르 위독 정보가 알려지자, 카브르를 걱정하는 많은 민중이 카브르 저택 주위에 모여들었다.[689]

6월 5일 밤에, 국왕과 국왕의 주치의인 리베리가 카브르의 곁을 방문했다.[690] 리베리 의사도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카브르는 국왕에게 “폐하, 프랑스로부터 이탈리아 왕국의 건국을 승인하는 서한은 도착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691] 국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692] 카브르와 국왕은 잠시 시간을 보냈고, 돌아가는 길에 국왕은 카브르와 악수를 나누며[693] “내일 다시 네 문병을 갈 생각이다”라고 카브르에게 전했다. 그러나 카브르는 “아니오, 폐하, 제가 내일 폐하를 뵙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694] 국왕은 리베리 의사에게 “(팔에서 사혈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뇌울혈을 고칠 수 없다면) 목에서 사혈을 하거나, 귀 뒤에서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695] 카브르의 맥박을 측정한 리베리 의사는 맥박이 상당히 약해져 있고 생명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국왕이 제안한 새로운 사혈 치료는 실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696]

6월 5일 심야부터 6일 새벽에 걸쳐, 카브르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여 있던 친척·친구·자코모 신부 등 앞에서 카브르는 의회에서 가상의 연설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698] “남부의 소란은, 남부 주민이 봉건적인 부르봉 왕조의 악정을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이며 그들이 나쁜 것이 아니다”, “가리발디는 로마의 해방을 바라고 있지만, 그 자체는 나도 바라는 일이다”, “티롤과 이스트리아(트리에스테)의 병합은 우리 세대에서는 달성하기 어렵고, 다음 세대의 일이 될 것이다” 등을 말했다.[699] 그러나 아침에는 목소리가 약해졌고, 6일 아침 7시경, 카브르는 숨을 거두었다. 50세였다.[700][701] 카브르가 마지막으로 한 연설로 알려진 것은 조카인 주세피나에 의해 정리되어 출판되었지만, 로메오는 미화나 윤색의 의혹이 있다고 말하고, 로메오에 따르면 카브르의 친구 카스텔리가 전 총리인 마시모 다제리오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702] 그 편지에는 카브르의 마지막 말은 “이탈리아는 건설되었다. 모두가 구원받았다.”라고 되어 있고, 조카인 주세피나에 따르면, 임종 직전에 종유례를 베푸는 자코모 신부에게 말한 “자유로운 국가의 자유로운 교회”가 카브르의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703]

카브르의 사인은, 실업가 시대에 걸린 말라리아 증상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705] 로메오는 “카브르의 증상은 현대 의학에서는 말라리아 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로시 의사는 증상이 발병한 초기 단계에 카브르에게 키니네를 처방하려고 했지만, 카브르는 키니네에 의한 치료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섭취를 거부했다. 키니네는 당시 해열제로 보급되고 있었고, 키니네가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당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말라리아에 걸린 카브르에게 그것이 처방되려고 한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카브르가 초기 단계에 키니네를 섭취했다면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카브르는 사혈 치료를 선택했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치료를 실시하도록 로시 의사를 협박했다. 소심한 로시 의사는 카브르에게 거역하지 못하고 사혈을 실시했다. 키니네에 의한 치료를 카브르가 받아들였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 같다.”라고 논하고 있다.[706] 이탈리아의 의학 교수인 주세페 레무찌는 카브르의 죽음은 사혈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707] 카브르의 사인을 말라리아 이외의 것으로 보는 설에는 혈전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병이었다는 설도 있다.[708]

6월 7일에 폭우 속에서 카브르의 국장이 거행되었다.[709] 토리노나 밀라노 등의 주요 도시에서는 애도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상점·극장·증권 거래소 등이 폐쇄되었다.[710] 스클로피스는 “왕의 장례식인 것처럼 엄숙하게 거행되었다”고 말하고,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인 마쉬의 아내는 “거리의 발코니가 검은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슬픔보다는 (카브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711]

국왕은 카브르의 시신을 사보이아 가의 전통적인 묘소인 스페르가 묘소에 매장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카브르의 시신은 친척의 의사를 존중하여, 피에몬테의 산테나에 있는 산테나 카브르 성의 예배당 지하, 고이토 전투에서 전사한 조카 아우구스토의 관 옆에 묻혔다.[713][714]

이탈리아 왕국 2대 총리에는 리카솔리가 취임했다.[715] 프랑스의 이탈리아 왕국 건국 승인 통지는 카브르 사후인 6월 15일에 도착했다.[716]

3. 유산과 평가

오늘날 토리노, 트리에스테, 로마, 피렌체,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에는 카보우르, 마치니, 가리발디의 이름을 딴 중요한 거리, 광장, 피아자, 지하철역이 있다.[20] 클리퍼선인 ''카밀 카부르'',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전함 '''콘테 디 카부르'''(Conte di Cavour), 그리고 새로운 이탈리아 해군 항공모함 '''카부르'''(Cavour)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65년 토리노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1568년 설립)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고등학교 중 하나인 ''Collegio dei Nobili''는 ''Liceo Ginnasio statale "Camillo Benso di Cavour"''(''리체오 클라시코 카부르'')로 이름이 바뀌었다.

카브르는 대중 앞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을 보였지만,[720] 실제로는 자만심이 강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721] 그러나 그의 정치적 능력은 당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했으며, 카브르의 역할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풍자화가 많이 그려졌다.[722][723] 로사리오 로메오는 "카브르는 자신의 우월성을 항상 믿는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후지사와 후스토시(藤澤房俊)도 카브르가 국왕에게 "내가 진정한 왕이다"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724]

카브르는 입헌군주제를 최선의 정치 체제로 여겼고,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 수립된 공화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725] 그는 프랑스 칠월 왕정 총리 기조의 “중용의 정신”에 깊이 감명받았지만,[726] 1848년 2월 혁명으로 칠월 왕정이 무너지자 크게 실망했다.[727]

카브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리베라리스트)임을 자처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루치아노 카파냐는 카브르가 심리적으로는 권위주의적 기질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다고 분석한다.[728] 카브르는 런던이나 파리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지만, 고향 토리노는 문화적 활기가 부족하다고 불평했다.[729] 그는 조국 사르데냐 왕국(피에몬테)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싫어했고, 가톨릭 교회와 반동 세력이 결탁하여 지배하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730]

카브르는 보통선거 실시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현재의 무지몽매한 일반 대중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면 국정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카브르는 유권자에게 필요한 자질로 “당파나 정부의 간섭·유혹에 견딜 수 있는 독립심”, “후보자의 의견과 특성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지성”,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꼽았으며, 유산자들은 이러한 성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732]

카브르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이탈리아어(피에몬테어)는 서툴렀다. 그는 의회 연설과 행정 문서를 모두 프랑스어로 작성했다.[734] 빈첸초 조베르티는 “카브르는 이탈리아적 특성이 부족하다. 그는 감각도, 직감도, 지식도 이탈리아인답지 않다. 관념은 영국인이며, 언어는 프랑스인이다.”라고 평가했다.[737] 그러나 카브르는 피에몬테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여성 작가 멜라니 발도르에게 “제가 평생 헌신하는 조국은 피에몬테이며, 저와 피에몬테는 불가분의 존재입니다”라고 편지로 썼다.[738]

카브르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자주 대립했다. 국왕은 카브르의 거만한 태도와 사생활 간섭에 불만을 가졌다.[745][750] 특히 국왕이 애인 로자 베르첼라나를 정실 부인으로 삼으려 하자 카브르가 강력히 반대했다.[753] 국왕은 카브르가 죽은 후, 외교관 제임스 허드슨에게 "카브르가 없었다면 훨씬 적은 노력으로 같은 목표(이탈리아 통일)를 달성할 수 있었고, 유럽 전체를 경계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758]

카브르는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차이니(Giuseppe Mazzini)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카브르는 마차이니를 암살 집단의 두목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지지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59][760] 그러나 프랑스 경찰은 카브르가 마차이니주의자들을 고의로 묵인하고 있다고 의심했다.[761] 마차이니는 카브르가 군주제 통일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을 만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고, 카브르의 죽음을 "이탈리아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762][763][764]

카브르는 가톨릭교회가 근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고[765],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근대 문명이 획득한 최대의 것”이라고 생각했고,[766] 가톨릭을 유일한 국교로 규정한 알베르토 헌장 제1조를 비판했다.[767] 카브르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당시 성직자들은 “카브르는 신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768][769] 교황청의 공식 기관지 『치빌타 카톨리카』는 카브르의 죽음을 “천상(신)으로부터의 복수”라고 보도했다.[770]

카브르는 평생 독신이었지만, 여러 여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771] 그는 스카피노 부인(Nina Giustiniani)과 불륜 의혹을 받았고,[774] 그녀는 카브르에게 버려진 후 자살했다.[780] 로사리오 로메오는 카브르에게 가혹한 비난을 가져올 만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781] 중년 이후에는 발레리나 비안카 론자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782][783] 그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냈다고 한다.[786] 카브르 사후 비안카는 카부르와의 관계가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카부르에게서 받은 편지를 친족에게 돌려주었지만, 정부 관계자가 이를 사들여 비밀리에 처리했다.[788][789]

카브르는 형 구스타보 카부르와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고,[791] 조카들에게 애정을 쏟았다.[797] 카브르는 조카 아우구스토가 고이토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피투성이 군복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했다.[798] 카브르 사후, 그의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조카 아이날도와 가족 간의 분쟁이 있었다.[800]

카브르는 의회 운영에 능숙했으며, “의회가 휴회 중일 때만큼 무력감을 느낄 때는 없다”라고 말했다.[806] 그는 청년 시절부터 우울증 증상에 시달렸고,[807] 애인 비안카 론자니에게 “너무나 큰 심적 고통”이라고 털어놓았다.[808]

카브르는 베르디와 교류하며 그에게 정치인이 될 것을 권유했다. 베르디는 카브르의 권유로 정치인이 되었지만, 카브르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여당 의원이었고 특별한 업적은 없었다.[812]

카브르는 미식가였고,[814] 와인에도 정통했다.[815] 그는 각지의 와인 생산을 장려하고 새로운 와인 제조법을 도입했으며, 바롤로의 품질 개선에 힘썼다.[816]

카브르는 레스토랑 캄비오와 카페 알 비체린(Caffè al Bicerin)의 단골이었다. 그는 조기 기상 습관이 있었고,[819] 프레쥐스 철도 터널(Fréjus Railway Tunnel) 건설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했다.[820]

카브르는 영웅담이 부족하고 엘리트적인 이미지 때문에 마치니나 가리발디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821] 그의 생애는 1967년 『카브르의 생애(Vita di Cavour)』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었고, 렌조 팔머가 카브르 역을 맡았다.

현재 일반적인 견해는 카브르의 관심사가 사보이아 왕가의 전통적인 국책에 기반한 피에몬테 영토 확장이었으며, 이탈리아 전토 통일을 구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22] 움베르토 레브라는 카브르의 민족적·통일적 정신은 부족했다고 평가한다.[822]

루치아노 카파냐는 가리발디의 업적은 카브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823]

카브르가 여성들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한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보수적인 역사가들은 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로사리오 로메오는 왕가 간의 결혼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8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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